EP.165 제23장. 친구니까. (4) 우리가 방문한 곳은 조용한 곳은 아니었다. 당장 호텔에 아주 비싼 방이 있을 정도인 곳이지 않은가. 관광객도 우리 외에 몇 무리만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바글바글했다.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외국인도 흔하게 보이는 유명한 관광지였으니.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같은 학교 애들을 둘씩이나 마주쳤던 게 조금 신기할 정도랄까.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는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있어도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가려서 찾기 어려워지니까. 하여간에, 그렇게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고, 도시도 꽤 큰 곳이었던지라 그냥 동네 돌아다니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너희는 진짜 붙어 다니는 거 좋아하는구나?” 여자애가 물었다. “학교에서도 그러더니 밖에서도.” “그럼.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인데.” 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매우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물론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구나.” 대답하는 여자애가 조금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왜,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음, 아니, 딱히 대단한 걱정이라고 할 건 아닌데. 왜, 집안에서 자꾸 참견한다고 했잖아. 친구 사귀는 것도 참견하려고 해서.” “그, 그렇구나.” “무시해, 그런 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심각한 이야기에 웅얼웅얼 대답하려니 채이가 말끔하게 잘라 말했다. “무시? 어른들 말을?” “무시하면 어른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어차피 너는 학교에 있을 텐데. 매번 와서 감시하려고 해도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을거고.” “어, 생각해 보니 그런가?” “주말에 집에 데려가지만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니야? 잠도 기숙사에서 자는데 뭐 어때? 방학 때 만나고 싶으면 집 근처 아닌 데 멀리 가서 만나면 그만이기도 하고.” “허어.” 여자애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다가.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럴 거다. 원래 ‘몰래 한다’는 게 다 그런 거니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거. 채이의 어머니도 과거에는 채이가 학원 안 가고 딴짓하는 걸 무척 싫어했지만, 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우리랑 계속 같이 다니면서 놀았다. 악당한테 공격받기 전에도 우리랑 꾸준히 아이스크림 가게나 그런 데 다녔었으니까. 해보기 전에는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응. 아마 자기도 비슷한 처지였던 적이 있어서 더 단호하게 말했던 건지도. 그나저나, 요즘에는 과거보다 훨씬 사이가 나아졌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청휘린을 직접 만나서 대화해본 적이 별로 없다. 정말로 집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는지, 가끔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채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현지도, 진우도, 조금씩 걱정되기도 하고…… 음, 여기까지는 너무 오지랖일까? “간단한 일이야.” “그렇구나.”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나중에 한 번 실험해 볼까.” 여자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뭐 특별하게 논 건 아니다. 여자애는 그냥 잠깐 숨 좀 돌리러 나왔을 뿐이고, 그렇다고 우리랑 같이 케이블카 같은 걸 타면서 관광지를 돌아다닐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다. “왜, 너희들끼리 가고 싶은 거 아니야? 굳이 내가 끼면 좀 어색하잖아? 응? 응?” 괜히 내 얼굴을 보면서 실실 웃는 게 조금 열받기는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긴 하다. 나는 어린 시절의 소이만큼 대단한 인싸 기질이 있는 건 아니라, 그렇게까지 친해지지 못한 사람이 나와 내 친구 근처에 있는 게 조금은 불편하다. 이 아이한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니까. “그리고…… 뭐, 나도 가족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가족이니까. 차라리 진짜로 친구끼리 놀러 왔으면 모르겠는데, 같이 온 가족도 있는데 처음 가보는 관광지를 다른 친구들이랑 미리 답사해 볼 필요는 없겠지.” 하긴, ‘집안 어르신’이라는 게 부모님을 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 적당히 점심 먹고 헤어지자는 분위기가 되어서 적당히 먹을만한 곳을 고민하는데— “어, 어.” 갑자기 진우가 화들짝 놀랐다. 그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카페 유리창 너머였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바닥에 쓰러진 노인이 한 명. 우리 모두 한순간 눈을 마주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우르르 뛰쳐나갔다. 바닥에 엎어져서 움찔거리는 노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몇 명은 이미 노인 팔을 들어서 일으켜 앉혀두었고.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긴 했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누군가 구급차를 부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사실 우리가 할 일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정식으로 등록된 영웅은 아니고, 여기서 괜히 노인을 더 빨리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나섰다가는 괜히 일이 더 꼬여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영웅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시스템들과 연계되어서 서로 유기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혹시 구급차가 왔는데 노인을 빠르게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조금 도와주는 정도일까. “그래도 일단 구급차 올 때까지는 지켜보자.” 현지의 말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떨어져서 기다렸다. 저 멀리서 이미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털썩. 어라. 그 소리에 우리 모두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아마 가족들과 여행 왔던 사람인 듯, 주변서 이미 다른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부축하여 일으키고— 다시, 털썩. 이번에는 노인이 아니라 한 젊은 여성. 다만 조금 말라서, 어딘가 창백한 인상이었다. 넘어지면서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쉽게 차리지 못해서. 그리고 다시, 털썩, 털썩. 한꺼번에 몇 명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던 순간. 끼익, 하고, 뭔가 불길한 소리가. 아무래도, 나는 손을 뻗어서 인도를 향해 돌진하는 차를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부러지는 느낌도 났던 것 같고. 보이지 않는 손이니, 당연히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겠지. 다만, 나는 손을 몇 번이고 뻗어서, 차를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서, 그다음의 기억은 별로 없긴 하지만. 내 친구들이 내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것 같긴 하다. * 정신을 아주 오래 잃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길어야 5분 내외가 아니었을까? 내가 정신을 차리니 아이들의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해.” 소이가 얼른 내 팔을 잡아끌었다. “소이야.” “엄마가 온다고 했어. 아빠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얼른 가자.” “어, 어어.”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멀쩡해진 것은 아니다. 통증은 팔이 사라지면 바로 사라진다. 아주 약간의 통증도 남기지 않고. 하지만 통증을 느낄 때의 충격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세 개의 팔이 부러지고, 다시 부러지고, 다시 부러지고.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에 눌리면서 으스러지던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아, 차, 차는?” “괜찮아. 안에 있던 사람은 구출했으니까.”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는 전봇대에 닿은 채 멈춰 있었다. 다행히 전봇대가 쓰러지지는 않았고, 차도 아주 조금 찌그러졌을 뿐, 안에서 에어백이 터지고나 한 흔적까지는 없다. 주변에는 구급차가 세워져 있었고, 구조대원들이 빠르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직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저 멀리서 몇 대가 더 출동하기라도 했을까. 그 모습에, 반짝.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그게 뭐였는지 선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이 비슷한 묘사를 봤던 것 같은데— “가자, 어서.” 소이가 팔을 잡아당겼다. 채이도. “하, 하지만,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난번에 병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옮긴다면. 내가 몇 명 정도는 어떻게든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소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볍게 저은 수준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떼쓰듯이 빠르게. 아. 그렇구나. 트라우마. 내가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도 트라우마를 느낀다면. 소이도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서. 왜냐하면, 나는 환자를 옮기다가 칼에 찔렸으니까. 그냥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수준의 칼도 아니고, 초인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아주 날카로운 칼에. 가장 친한 친구의 눈앞에서. “…….” 뒤를 돌아보았다. 상황이 결코 녹록치는 않아보였지만, 사람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이미 구조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구조대원들과, 벌써 와서 상황을 통제 중인 몇몇의 영웅들. 유진 아줌마와 도현 아저씨도 온다고 하셨으니까, 분명 미숙한 아이 하나 더 낀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소이를 따르기로 했다. 소이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는 동안, 자꾸 머릿속에서 뭔가가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걸릴 때마다 자꾸 불안감이 커진다. 정작, 그 걸리적거리는 생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떠올리지 못했다. A word from the author (A/N):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