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제13장. 쟤가 너랑 대화 좀 하고 싶대 (2) 뭐, 어쩌다 보니 일진이 찐따 괴롭히는 것처럼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내가 진짜로 괴롭히려고 부른 건 아니잖아? 게다가 나는 누굴 괴롭힐 깜냥도 되지 않는다. 전생에도 그냥 교실 한구석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찐따였다고. 솔직히 ‘공감대’라고 하면 현지나 소이 채이보다 오히려 남진우한테 더 공감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내가 처음 그 소설을 골라 읽었던 이유가 그거였을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취급을 받던 남주인공이 결국 성장해서 인정받고 하렘물 주인공이 되는 내용이니까. 이제 와서 보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 아니, 뭐, 원작이야 어쨌건 간에. 말을 거는 건 좋다. 좋은데 말이다. “……왜 여기로?” “어? 뭔가 남들 앞에서 하기 힘든 말 하려는 거 아니었어?” 소이가 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평소처럼 활짝 웃고 있는데, 뭔가 얼굴이 무시무시하다. 예쁜 얼굴에 예쁜 미소가 어렸는데 왜 이렇게 오금이 저리는 걸까. “맞아. 혹시라도 루아가 하는 말이 좀 민망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거니까.” 아니. 민망해 봐야 얼마나 민망하다고…… ……. 아니, 민망하긴 한 이야기이긴 한데. 굳이 따지면 그냥 민망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무도 듣지 않는 게 좋을 정도의 이야기이긴 한데. 특히 소이와 채이와 현지는 들으면 안 될 이야기 아닌가? 시선을 살짝 돌려서 현지를 보았다. 현지는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벽에 기대 있었다. 우리가 서있는 이곳은 학교 건물 뒤편. 학교가 산을 깎아 지어졌다가 보니 건물 뒤쪽에는 산이 있었다. 아주 높다고 할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 건물보다 조금 더 높아서 건물 뒤편이 우중충하게 그늘지도록 하긴 충분하다. 그렇다. 이곳은 전에 남진우가 다른 애들한테 잡혀 와서 구석으로 몰렸던 거기였다. 남진우를 벽에 기대 세워두고, 내가 그런 남진우와 마주 서고, 내 양쪽으로는 소이와 채이가 서는 바람에 꼭 남진우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건물 뒤편의 한쪽은 작은 창고가 있어서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틈 정도밖에 없기에 쉽게 도망갈 수 없고, 여기로 들어올 수 있는 쪽의 벽에는 현지가 기대고 서 있었다. 이래서야 그냥 찐따 하나 잡아다가 돈 뜯으려는 구도 아닌가? 우리 쪽이 죄다 여자이긴 하지만, 원래 숫자 앞에서는 남녀 성별도 없는 법이다. 게다가 덩치가 더 크더라도 원래 사람은 사람을 쉽게 때리지 못하는 법이라, 싸울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괜히 겁에 질리곤 한다. 그보다 남진우 앞에서 성별 운운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긴 하다만. “……야.” 소이와 채이의 시선이 따가워서 일단 입을 열긴 했다.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이유는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소이와 채이는 내가 남자애랑 단둘이 있는 게 엄청나게 걱정스러운 거다. 그 상대가 남진우인데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긴 한데. “어, 어?” “너…….”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가 진짜 궁금한 건 남진우의 성별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남자라는 성별 말고 진짜 성별. 차라리 남자라면 그냥 앞으로도 거리를 두면 되고, 여자라면…… 음, 여자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게다가 조금 미안하기도 하니까. 내 존재로 전개가 바뀌어서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도 좀 있고. “……기숙사에서 지내지?” 그렇다고 이 세 사람 앞에서 비밀을 까발리긴 좀 그러니, 일단 그거 말고 궁금하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어, 응, 그런데…….” 소이와 채이의 고개도 갸웃거린다. 그야 이 학교 학생들은 진짜 특이 사항이 없는 이상은 전원 기숙사제니까. 물론 특이 사항이라는 것도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대비해서 적당히 만들어 둔 예외일 뿐이지, 원작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예외 없이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 그럼, 방은 다른 애랑 쓰는 거야?” 소이와 채이의 머리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갸웃거렸다. 아니, 왜 자꾸.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는데 더 무서워졌잖아. 남진우도 지금 완전히 쪼그라들어서 우리보다 키가 작아졌다고? 목이 너무 구부러져서 거북목이라도 올까 좀 무섭다. 그전까지는 곁눈질로 흘끗 보거나, 좀 거리를 두고 보거나 해서 자세히 볼 일 없는 얼굴이었지만, 확실히 곱상하다.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라는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여자 옷 입히면 헷갈리지 않을까?’하는 정도는 된다. 아니, 헷갈리기보다는 그냥 숏컷 톰보이가 될 것 같은데. 물론 톰보이라기에는 외모만 그렇고 성격은 여전히 소심하겠지만. “어…… 아니?” 남진우의 얼굴에 매우 경계심이 어렸다. “그럼 혼자 써?” “혼자, 쓰는데?” “어떻게?”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진우는 눈동자를 떨었다. “나, 나도 몰라. 그냥 원래 혼자였어.” “…….” 그럼 교장도 일단 알고 있었다는 소리네. 물론 당연할 거다. 겉으로 남장을 한 채로 다닌다고는 해도, 주민등록상의 번호는 절대 속일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나와 소이, 채이를 같은 방에 배정해 준 것처럼, 교장도 남진우의 문제를 알고서 최대한 트러블 없게 처리해 준 것이리라. “……왜, 왜?” 남진우가 물었다. “어?” “내가 기숙사 혼자 쓰면, 안돼?” 허. 이놈 봐라. 여전히 쭈글쭈글한 태도이긴 하지만, 얼굴에는 아주 약간이지만 반항하는 것 같은 표정을 그려보이고 있다. “…….” 내가 만만한가? 아니, 그러니까, 특별히 얘가 이래서 화가 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내 전체적인 인상 말이다. 왜, 나는 이미 남진우를 구해준 적이 있다.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까지는 생각 안 하지만, 일단은 남진우는 꼼짝도 못 하는 일진 남자애를 상대로 싸워 이기긴 했단 말이지. 그리고 같은 반 애 중에서도 아직 나와 싸워 이긴 애는 한 명도 없고. 다음 주에는 현지나 소이와 맞붙게 될 테니 어떻게 될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내 실력으로 봐서는 싸움으로는 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런 태도일까. “아.” 맞다. 나 얘 가슴 만졌지. 그러니까, 내가 만만해서라기보다는 진짜로 위협을 느낀다는 걸까. 혹시라도 자기 비밀을 파헤칠까봐. 흠. “…….” 나를 가볍게 노려보는 남진우를 두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런 구도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믿기 어려울 거고. 그럼…… 잘 대해주면 되나? 적의가 없다는 걸 알려주면 되려나? 나는 잠깐 고개를 기울인 채 고민하다가,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해?” —그렇게 물었다. “뭐, 뭐뭐뭐, 뭣!?” “루, 루아가…….” 아니, 너희 둘은 왜 그렇게 놀라는데. 그냥 말 거는 거잖아, 말. 물론 상대가 남자애라서 좀 이상하게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은 남자애들이나 여자애들이나 별문제 없이 그냥 섞여서 잘 노는 거 아니었어? 나 고등학생 때는 그러던데. “하, 학교 끝나고는, 왜?” “……그냥? 너도 친구 없는 거 같아서?” “…….” 차마 반박하지 못한 채 얼굴만 빨갛게 붉히는 남진우. 이름이 너무 남자 같아서 그렇지, 이렇게 보면 또 소녀로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남주인공보다는 히로인의 위치가 더 어울리지 않나? 하긴 생각해 보면 남주인공인 남진우의 일러스트는 따로 없긴 했다. 작가가 예의상 이모티콘에 하나 넣어준 정도 빼고는. 그나저나. 왜 남진우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어쩌면 본능적으로 만만한 놈이 누군지 알아차리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워낙 오래 만만한 놈으로 살다 보니 친하게 지내도 될 것 같은 놈들은 그럭저럭 알아봤었으니까. “……방과 후에 같이 저녁 먹을 건데, 그럴래? 매번 식당 구석에서 혼자 먹잖아.” “호, 호, 혼자 먹는 게 편한데…….” 동감한다. 너무나 동감한다. 혼자 지내는 것에 아주 오래 익숙해지다 보면, 솔직히 누가 밥 먹는데 말 거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게 된다. 직장에서 그랬는데. 나보다 열 살 많은 아줌마가 자꾸 호구조사 하려고 해서 굉장히 짜증 났던 기억이 있다. “야.” 하지만 남진우의 대답을 듣고 소이가 곧장 반응했다. “루아가 먹자잖아.” “어, 어?” 나한테는 그래도 어떻게든 반응하던 남진우는 소이의 말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심지어 채이는 아무 말 없이 남진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고. 음……. 얘 이거 트라우마 되는 건 아닌지 몰라. 흘끗. 현지를 봤는데, 얘는 또 얘대로 뭔가 어이없다는 듯 날 보고 있었다. 그냥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아야겠냐는 듯한 표정. 나의 본성을 그럭저럭 알게 되었기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겠지. ……아니, 그런데 그건 솔직히 억울한데.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니라, 소이랑 채이가 알아서 만든 분위기라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일진 노릇 해본 적 없는 내가 무서운 표정 지어봐야 얼마나 무섭다고. * * * 살 떨리게 무서웠다. 자신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대하는 듯 무심한 표정의 서루아. 그리고 남진우가 무슨 대답을 해도 화난 표정인 임소이. 무표정하게 노려보고만 있는 문채이. 차라리 서루아가 혼자 있었다면 그렇게 무서운 인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양옆에 그런 애들이 있으니까 진짜 살 떨리게 무섭다. 오늘 무슨 짓을 하려고? 힐끔. 학급 반장으로 추천받은 백현지를 보았지만, 정작 나가는 쪽 벽 먼 곳을 지키고 선 백현지는 이쪽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 “딸꾹.” 임소이의 말에 남진우는 딸꾹질을 한 번 하고. “어, 어어.” 결국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 그럼 여섯시 쯤 보자. 아직 학생 식당 말고 다른 곳은 안 가봤지?” 루아가 묘하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 표정이 양옆 소녀들의 표정과 너무 대비되어서, 남진우는 차마 마주 웃어주지는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A word from the author (A/N): 자정 전에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