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2 제23장. 친구니까. (1) 다행히 내 일행 중에서 이 여자애를 싫어하거나 견제하는 것 같은 표정을 보이는 애는 없었다. 이유가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왜, 견제한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뭔가 여자로서 느끼는 자존심 대결 같은 거랄지. 물론 소이나 채이, 현지의 성격을 보면 딱히 그런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일단 소이와 채이는 진우의 모습에 묘한 경계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나로서도 그 여자애가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은 게, 걔랑은 아무래도 신체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이와 채이는 나와 신체접촉 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심지어 이렇게 살을 많이 드러낸 복장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등이나 팔에 자기 몸을 붙여왔으니. 현지는 여전히 조금은 거리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매일 있는 내 가슴에 얼굴 묻고 안기기에는 꾸준히 참여하고. “여긴 며칠이나 있어? 나는 사흘.” “우린 닷새는 더 있을 거야.” “정말? 다행이다! 그럼 몇 번 더 놀러 와도 괜찮을까?” “응, 뭐.” 여자애의 말에 소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여자애는 그런 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얼굴을 반짝반짝. ……진짜로 집안 어르신들이랑 있고 싶지 않은 분위기다. 하긴 조금 재미없을 수도 있는 나이이기는 하지만. 이제 보니까 왠지 저 여자애 성격에 비해서 수영복이 좀 조신한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 여자애가 가고 나서, 진우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우리 말고 다른 애가 있어도 괜찮겠어?” “아, 응.”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 도움도 받았고, 또 걔는 모르는 것 같으니까…….” 음.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 그 남자애 쪽이 정상이 아닐까 싶긴 한데. 아닌가?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현실에서 여장남자가 내 주변에 있는 걸 본 적 없으니까. 행사장 가서 여자가 미소년 코스프레 한 걸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남장이라기에는 여자 티가 엄청나게 많이 났달지, 오히려 그게 어떤 의미로는 그 코스프레의 핵심이랄지. 내 주변에서 이 악물고 자기가 남자라고 우기는 애가 있었다면 과연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아니지, 생각해 보면 나도 학기 초에는 남진우가 진짜 남자라고 생각했으니 속긴 속은 거려나. 그냥 ‘상상도 못 했다’라고 하는 쪽이 맞을 거다. 여러 가지 의미로. “큰일 날 뻔했네.” “응, 큰일 날 뻔했어…….” 왜 그런 말을 배시시 웃으면서 하냐, 너는. 하긴 나중에 다시 떠올렸을 때 추억 정도는 될 수 있으려나. ‘너 그때 들킬 뻔했잖아’하면서 낄낄댈 추억. “뭐야뭐야, 둘이서 막 분위기 잡고. 나도 끼워주라.” 소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맞아 맞아. 둘만 분위기 잡고. 아주 결혼까지 하겠네.” “겨, 결혼이라니.” 아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면 좀 이상하거든, 진우야? 봐, 소이와 채이의 눈이 또 가늘어졌잖아. 아, 그리고. 나는 고개를 쭉 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현지는 이번에도 또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손을 파닥파닥 흔들자 현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얘는 또 왜 수동적이야?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아직도 현지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 아직도? “혀, 현지야, 예, 예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뭐, 뭐뭣!?” 하지만 내 말에 현지의 반응이 너무 격해서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 이런 칭찬은 하면 안 되는 거였나? 괜히 놀리는 것처럼 보였으려나?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시 소이와 채이 때문에 날아가 버렸다. “그럼 나는, 나는!?” “예, 예쁜데? 소이는 원래 예쁜데.” “뭐야, 그럼 나는 안 예쁘다는 거?” “아, 아냐. 채이도 원래 예뻐.” 아니, 얘들 왜 이래. 뭔가 정신이 없네. 하지만 양쪽에서 팔을 붙들리고, 사방에서 자기 예쁘다고 해달라고 하는 등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왠지 기뻤다.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놀러 나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아, 그래도, 내가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고는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럼, 슬슬 돌아갈까? 아빠 엄마 기다리겠다.” 소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엄청나게 배고프다는 걸 느꼈다. 그렇구나. 오늘은 진짜 하루 종일 밖에서 놀았네. 아무리 에너지 넘치는 십 대라고 해도 지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 “으아, 배고프다.” 소이가 그렇게 외치고, 우리 모두 조금 웃었다. 채이나 현지, 진우도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 붉어진 하늘을 등지고, 우리는 얼른 호텔을 향했다. * 밤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잠들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도현 아저씨와 유진 아줌마는 우리와는 다른 방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방 안에서 노는 거랑 밖에서 노는 건 또 다르니까. 해가 졌는데 바다에 들어갈 생각은 당연히 없어서, 우리는 모두 가벼운 옷을 입고 방 밖으로 나왔다. 한여름 밤의 바다다. 밤이 되었다고 열기가 바로 식지는 않고, 바다 근처니까 습하기는 또 엄청나게 습하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아서 딱히 고즈넉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 미묘한 어수선함이, 또 어떤 의미에서는 축제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설렌다. 바가지가 분명한 가격의 길거리 음식을 몇 개 사 먹고, 다 같이 슬리퍼를 벗어들고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간질간질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면서 걷다가, 어느새 뛰고 있기도 하고.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소이와 채이가 또 서로 붙잡겠다고 막 뛰기 시작해서, 어느새 나와 현지, 진우 이렇게 셋만 남겨지고 말았다. “후우, 조금 앉을까?” 내가 그렇게 제안하자, 현지와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사장 적당한 곳에 대충 털썩 앉았다. 옷에 모래가 좀 묻긴 하겠지만, 뭐 바다에 왔으니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진우는 주저 없이 내 바로 옆에 붙듯이 앉았고, 현지는 내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으려고 하길래 손을 살짝 잡았더니 얼굴을 붉히며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야 나도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내가 대체 어떤 용기로 그런 걸까? 음, 하지만 어쩔 수 없나. 현지 얘는 자꾸 알아서 겉도려는 성격이라서 옆에 잡아두지 않으면 멀어져 버리니까. 그리고 나는 기껏 사귄 친구와 멀어지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고. “저기, 있지.” “응.” 잠깐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는데 진우가 입을 열었다.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나보다 하고 그냥 대충 건성으로 듣고 있는데. “내가 남장하고 다니는 이유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폭탄 발언이 나왔다. “아, 야, 잠깐.” “사실은— 아, 응.” 내가 불쑥 말을 끊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진우가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뭐야, 갑자기?” “응?” “아니, 그전까지는 남장에 대해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갑자기 말하는 이유가 뭔가 해서.” “아, 그게.” 내 질문에 진우는 곤란하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얘도 피부가 상당히 희다. 온종일 놀았는데도 아직 그을린 흔적도 없는 걸 보면 이 세상 특유의 어떤 힘이라도 작용하는 건지. 그 하얀 피부가, 목덜미부터 귀까지 서서히 붉어진다. “치, 친구니까.” “친구니까?” “응, 응. 저, 저기, 나 어린 시절부터, 친구가 별로 없어서.” “아, 응.” “남, 남자애들은 알고 지내다 보면 왠지 시선이 이상해져서, 무서워서.” “어, 응.” “여자애들도, 어느 순간부터 막, 나를 싫어해서.” “어…… 응.” 뭔가 대화가 갑자기 확 어두워지지 않았어? 이게 저렇게 은은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할 이야기인가? “그,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냈었는데.” “응.” “이렇게 친구가 처음으로 생겨서, 너무 기뻐.” “어, 그, 그렇구나.” 정말 오랜만에 진우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 그야 이런 상황에서 말을 더듬지 않을 수가 있나? 뭔가 좀 무겁지 않아? 우정이 무거워. 물론 내 우정이 가볍다는 건 아니다. 어쩌면 소이나 채이가 봤을 때는 내 우정도 진우가 말하는 이런 분위기가 날지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뭐랄까, 나한테 우정을 보여주는 애 중에서는 이런 분위기는 또 처음이라. “그래서 생각하고 있었어. 그, 친구라면, 비밀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 나는 현지 쪽을 보았다. 현지도 사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래도 부끄러워서 입 다물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조금 심각한 얼굴인 게 진우 말을 꽤 진지하게 듣는 듯하긴 했지만. “……그 비밀.”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주 중요한 거야?” “음, 자, 잘은, 모르겠는데.” “몰라?” “응. 나는, 그냥 그렇게 들었을 뿐이니까.” 자기도 확실하게 모르고 남장한다는 건가? 하지만 이해 못 할 건 또 아니긴 하다. 어른들만 아는 어떤 비밀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고. 가문 내력이라거나. 이런 세상이 아닌가. 괴물도 존재하고 초능력도 존재하는 세상인데, 누군가 남장을 해야만 하는 사연도 있을 수 있는 거지, 뭐. “음, 그럼, 일단 애들 다 모이면. 이런 데 말고, 좀 더 조용한 데서 말하는 게 어떨까?” “어, 어, 그런가?” “그야, 아까 그 남자애도 있던 곳이니까.” “아.” 그제야 진우가 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게 분위기 타서 홀라당 해버려도 되는 이야기야?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아무튼, 주변을 한번 둘러보니 딱히 아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아서, 일단 작게 숨을 내쉬었다. A word from the author (A/N):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