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3 제23장. 친구니까. (2) * * * 지구의 면적을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면, 사실 바다는 육지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게다가 얕은 곳에서 깊은 곳까지 전부 생물로 가득가득 차 있기까지 한 곳이라서, 지구상의 생물 중 대부분은 아예 바다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바다라는 광경은 지상의 모든 광경보다도 훨씬 흔해빠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 굳이 와서 본다고 해도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없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다는 사실에, 현지는 계속 당황한 채였다. 바다에 오고부터 쭉 그랬다. 아니, 사실 바다가 문제가 아니라. 수영복을 고르던 때부터. 아니, 그 전에 방학 되면 바다에 다 같이 놀러 오자고 이야기 나누던 때부터. 아니, 사실은 그 이전에, 그냥 그날 아침에 다 같이 놀러 나가던 때부터. 아니, 아니, 아니. 계속 계속, 그 전의 설레던 순간을 차근차근 돌이킬 때마다 점점 더 과거로 가는 것이다. 십 대 중반의 소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건 그냥 당연한 일일 터였다. 거기서 공부하는 것도 당연하고,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는 기숙사에서 지내야 한다는 규칙이 있으니 그냥 다 당연한 일일 터였다. 거기에 굳이 특별함을 끼워 넣을 이유는 없을 터였다. 처음에도 그랬다. 그냥 서로 마주치면 성가시게 될 위치의 아이가 같은 방을 쓰게 되어 귀찮게 되었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 그날조차 그냥 이런, 평범하게 굴러가는 일상 사이에 있었을 테니. 아니, 애초에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순간 자체가 없을지 모른다. 그저 가랑비에 옷 젖어가듯, 처음에는 젖는 줄도 모르다가 그냥 어느 순간에 푹 젖어있어서. 그냥 무미건조하던 일상이, 어느 날부터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조금씩 설레서. 같은 방을 쓰는 사이다. 눈을 떠서 침대에서 일어나면, 그보다는 조금 늦게 일어나는 세 소녀가 한 침대 위에서 대충 얽힌 채 자고 있다. 부스스 눈을 뜬 루아는 현지를 보면서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아침이다. 그냥 평소와 다르지 않게 씻고, 옷을 입고, 준비해서 학교 가고, 수업 듣고, 필요하면 방과 후에 공부도 했다가 학교 안의 카페도 가고 식사도 하고…… 지금까지 쭉 혼자서도 해오던 평범한 일들인데, 왜 그 하나하나가 다 이상하게 특별하게 느껴져서는, 지나가는 시간마저 아쉬워지는 건지.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니까 그 모든 빛을 비추는 존재가 바로 루아라는 걸. “…….” “현지야?” “……응?”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루아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흠칫. “다른 애들 다 있을 때 들어도 괜찮지?” “어, 응.” 다행히 귀를 열어두고 있어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던지는 기억하고 있다. 전부 다 정확하게 들었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러니까 진우가 여장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말을 꺼내려고 했던가. “……어, 저기, 혀, 현지야?” “응?” “그, 그렇게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 “아, 미안.” “미안해할 것까지는 없는데…….” 루아의 말에 얼른 시선을 돌려서 바다 쪽을 보았더니, 루아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루아 옆이 좋았을까? 그것도, 무언가 깨달은 다음부터일 것이다. 무미건조하게 집과 학교와 병원만 왕복하던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들여서는 일상을 반짝반짝 꾸며주었다는 걸 깨달아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유가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루아의 행동을 보면, 이유가 없는 행동도 아주 많아 보이니까. 밤바다가 반짝인다. 그 또한 그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밤바다라고 비어있는 건 아니고, 또 관광지가 밤이라고 어두워질 일도 없으니까. 길거리의 가게들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고, 바다 위에도 배가 떠있으니 그저 당연한 일일 텐데. 그럼에도 이런 순간들이 전부 반짝거리는 것은 결국 친구와 함께 있기 때문일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어버려서. 그 모든 감정과 생각을 다 그러모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아마 그게 ‘추억’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앗, 루아야!?” 저 멀리서 소이와 채이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네끼리 다투는 데 열중하다가 어느새 루아의 양옆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에 경악한 듯. 아주 조금 쌤통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물론 곧 달려와서는 루아의 앞뒤 자리를 쟁취해 버리는 둘에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지만. “…….” 루아의 앞에 앉아서 기대듯이 꾹꾹 눌러대는 채이. 루아의 뒤에 앉아서 역시 앞으로 기대는 소이. 어느새 루아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기댄 진우. “…….” 누군가에게 다가가 본 적은 없다. 아마, 굳이 따지자면 주변에서는 가시를 세운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버지가 영웅으로서 일하다가 영웅으로서 다치셨으니, 자신도 영웅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현지였다. 모든 규칙은 다 지켜야만 하는 것이고, 규칙이 아니더라도 나머지 학생으로서의 본문은 전부. 정작 그렇게 생각하던 현지조차도 막상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안 쓰는 애들이랑 엮이니 역으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려서는. 결국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현지가 몸을 옆으로 기댔다. 루아의 팔은 부드러웠다. 자기보다 살짝 키가 큰 현지가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자 루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잔뜩 긴장한 표정이 되었지만, 현지는 그게 오히려 기뻤다. 그 기쁨이 좋지 못한 감정이라는 건 알면서도. 왜냐하면, 루아는 언제나 현지를 당황하게 만드니까. 그러면서도 계속 옆에 있고 싶게 만드니까. 옆에서 조금 쭈뼛거리고만 있어도 멋대로 끌어다가 자기 옆에 세워버려서, 매번 기대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러니까, 음. 루아 탓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주변에 있는 애들 다 그렇게 생각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조금 죄책감은 느끼면서도 그 어깨에 기대서 슬쩍 눈을 감는 현지였다. * * * 마지막으로 바다에 왔을 때가 작년 여름이다. 그때는 당연히 소이와 채이 두 사람하고만 있었다. 우리가 묵은 곳도 호텔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 빌려준 집이었고. 침대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 셋 모두 그냥 거실에서 신나게 놀다가 대충 곯아떨어졌었다. 얇은 이불 몇 개만 꺼내두고 신나게 놀았었으니, 뭐.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앞뒤로 소이와 채이에게 끼어있어서 좀 당황하긴 했지만. “뭐야, 너희들. 너희 방으로 안 가?” 이번에 우리가 묵은 곳은 호텔이다. 유진 아줌마와 도현 아저씨는 우리에게 이런 곳을 잡아줄 때 돈을 절대로 아끼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이번에 우리가 묵는 방도 네 사람이 쓰기에는 엄청나게 큰 방이었다. 아니, 이걸 방이라고 해도 괜찮나? 굳이 따지자면 집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호텔 건물 안에 있는 곳이고, 일단은 ‘스위트 룸’으로 분류되고, 호실도 붙어있으니, 방은 방이긴 해도. 거실도 있고, 운동하는 방도 있고, 심지어 안에 방도 여러 개라. “……아직 놀 거 아니었어?” 채이의 말에 현지가 물었다. “늦은 시간이잖아. 슬슬 잘 준비해야지.” “너희도 거실에 있잖아.” 소이와 채이는 우리가 지난번에 놀았던 걸 그대로 재현하고 싶기라도 했던 모양이지만, 진우와 현지는 당연하다는 듯 거실에서 비키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나만 죽을 맛이었다. 안 그래도 소이와 채이가 한쪽 팔씩 잡고 늘어져서 움직일 수 없는데, 이제는 발과 다리도 한 쪽씩 잡혀서. 다리는 팔 만큼 감각이 예민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느낄 건 다 느낀다. 진우와 현지의 부드러운 몸이 고스란히 다 느껴진달까. 현지의 몸은 소이와 채이 두 사람과는 조금은 다르다. 마냥 부드러운 채이, 탄력 있는 소이와는 조금 다르게, 좀 다부지다고 할지, 운동을 열심히 한 몸이랄지. 하지만 그런데도 피부는 또 이상하게 부드럽고, 그, 몸의 특정 부위는 근육이 아예 안 붙었달지, 음. 진우는 또 진우대로 부드럽다. 소이와 채이, 현지와는 좀 차이 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없는 게 아니다! 평소에는 붕대로 칭칭 감아서 겉에서 만지기에는 약간 위화감이 있을 뿐 단단하게 느껴지는 주제에, 이렇게 붕대를 풀어버리면 또 부드럽기는 부드러워서—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람. 그러니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나는 천하의 파렴치한이 되어버리는 상황인 것이다. “저, 저기, 얘들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불편하지 않아?” 소이와 채이는 나랑 같이 소파에 앉아있으니 그렇다 쳐도, 진우랑 현지는 바닥에 있지 않나? 아무리 한국인 특징이 좋은 소파 두고 굳이 바닥에 앉는 거라고들 하지만, 거기 앉아있으면 소이랑 채이 다리에 좀 치이지 않나? “……이렇게 기대있으면 편해.” “어, 응, 마, 맞아. 침대에서 베개 안을 때 같아.” 그런가. 아니, 내 몸이 좀 부드럽긴 한데. 그 정돈가? 하지만, 음. 내가 뭐라고 해도 애들이 비켜줄 건 아니라는 걸 알아서. 결국 나는 한참 동안 그렇게 굳어있어야만 했다. 아까 바닷가에서도 그렇고,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싫은 건, 음, 아니긴 한데. A word from the author (A/N):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에 일정이 있어서 한 화밖에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ㅠㅠㅠㅠ 주말에는 제대로 두 화씩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