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4 제23장. 친구니까. (3) 분명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두었던 것 같은데. 한여름이라고는 해도 에어컨을 강하게 틀면 실내의 온도는 실외의 온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지는 법이지 않은가. 오히려 조금 추울 정도까지도 온도가 내려가고, 호텔은 그래서 애초에 여름이라도 이불은 두꺼운 걸 구비해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적어도 덥지는 않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으…….” 어느새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온몸이 끈적끈적했다. 내 땀과, 다른 애들의 땀으로. 평소라면 나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아이들은 소이와 채이뿐이다. ……아니, 둘씩이나 되니까 ‘뿐이다’라는 말을 붙여도 될까 싶기는 한데, 일단 지금은 그 둘보다 더 많으니까. 그렇다. 지금 내게 달라붙은 애들은 평소의 두 배. 일단 평소처럼 내 양쪽에 붙은 소이와 채이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다가, 다 같이 모여 앉아 이야기하느라 소파에서 내려와 있다가, 영화 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바닥에 누워버린 내 양쪽을 소이와 채이가 한 쪽씩 차지하고, 내 아래의 양쪽을 진우와 현지가. “……어?” 아니, 잠깐만. 시선을 내려본다. 더운 이유가 바로 보였다. 내 몸은 다른 아이들의 체온으로 따뜻하다 못해 더웠지만, 정작 내 주변을 차지한 애들은 내 몸을 덮느라 자기네 몸이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지 않던가. 대체 언제 가져왔는지, 방의 이불을 거실까지 끌고 와서 덮고 있었다. 당연히 내 몸 위에도 일부가 올라갔고. “……흡.” 아랫배 쪽에 위화감이 있다. 시선을 내려보니, 우리의 몸을 아무렇게나 덮은 이불들 사이에서 현지와 진우의 얼굴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소이와 채이 다리 아래쪽에서 조금 불편하게 자리를 잡다 보니, 음. 내 가슴 바로 아래쪽, 명치쯤에 현지의 정수리가. 그리고 그 아래쪽, 아랫배 위에는 진우의 얼굴이 올라가 있는 듯. ……이거 괜찮은가? 아니, 진짜로 괜찮은가? 아니, 기숙사에서 매일 그렇게 자면서 이제 와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그, 저기, 얘들아?” “으응…….” 내가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불러봤는데, 소이가 꼼지락거리더니 내 몸쪽으로 슬금슬금 얼굴을 옮긴다. 채이도 마찬가지고. 그러다가— 툭. 두 사람의 정수리가 부딪쳤다. 어, 소리 조금 크지 않았나? 아플 것 같은데. 이래도 안 깨나? 하지만 내 양쪽 가슴에 나름대로 묻은 두 아이가 깨는 일은 없었다. 뭔가, 이불 안쪽이 여러모로 습한데. 파자마 안쪽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서. 분명히 이불 밖으로 나가면 옷이 몸에 찰싹 들러붙을 거다. “…….” 그런데, 싫은 건 또 아니고.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애들이 조금 싫어할 것 같아서 차마 하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그 뒤로도 한 시간 정도, 나는 몸을 완벽하게 구속당한 채 아이들의 품에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둘째 날은 조금 느긋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첫날부터 너무 열심히 바다에서 놀았던 것도 있고. 휴가 자체도 꽤 길게 나오기도 했고.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바다 근처에서만 보내려는 건 아니다. 근처의 다른 관광지도 조금씩 들려보기로 했다. 사실 그런 것으로 심심할 일은 없기도 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놀러 왔다는 게 좋은 거니까. “하아, 살겠다, 살겠어.”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우리와 만난 그 아이는 스무디를 쭉 들이키더니 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참고로 따로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애초에 우리는 연락처도 교환 안 했고. 그런데도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게 좀 희한하긴 하지만. 이게 여고생의 평균적인 친화력인 건가? 하긴, 생각해 보니까 소이도 초등학생 때는 그랬던 것 같다. 그 많은 아이와 전부 연락처를 하나하나 다 교환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왜, 어른들 앞이라서 불편하기라도 해?” “말도 말라니까. 친척 어르신들이 오죽 깐깐해야지. 내가 이 나이 먹고도 연애 못 하는 것도 다 그 사람들 때문이고.” ……이 나이 먹고, 라고 할만한 이야기인가, 그게? 물론 십 대 시절 연애하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만. “지, 집안이 조금 보수적이야?” “응, 그렇지. 내가 사촌 오빠 얘기했지? 그쪽이 훨씬 더 어른들 입맛에 맞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 수영복도 비키니는 절대 안 되고, 친구들끼리 놀러 가는 것도 안 된다 그러고. 하아, 고등학생 첫 여름방학이잖아?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 줄 알아? 수영복 입으려고 다이어트도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한 컵에 500칼로리는 될 것 같은 호화 스무디를 주문하긴 했지만, 굳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내 눈에는 학기 중에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얼굴 살이 잘 안 빠지는 체질일 수도 있고. “그 수영복도 그나마 허락받은 걸로 산 건데도 어른들이 보는 눈이 어마어마하게 깐깐했단 말이야.” 참고로, 지금은 수영복 차림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고. 오전에는 잠깐 느긋하게 쉬다가 오후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로 한 참이라. 혼자 들어가서 놀아봐야 뭐가 재미있냐, 라는 말이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친척들은 없어?” “재수 없는 사촌 하나를 빼면 나머지는 나보다 한참 어린 사촌들이야.” 아하. 그러니까 바다 들어가면 초등학생 무더기랑 놀아야 한다는 소리다.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는 간다. 그나저나 집안이 생각보다 보수적이구나. 그런데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아니, 오히려 보수적인 집이 더 많지 않을까? 영웅들의 집안이라면. 오히려 유진 아줌마나 도현 아저씨 쪽이 상당히 자유롭게 풀어두는 쪽에 가까우리라.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종종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밝았던 것도, 어쩌면 학교에 오면서 오히려 그 자유를 만끽하게 되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 또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여자애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한쪽으로 보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만났던 걔가 있었다. 그 일진. 우리를 보고서 못 본 척하는 건지, 다행히 눈이 마주치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옆에는 누나라는 사람도 같이 있었고. “쟤는 왜 자꾸 나타나는 거지.” 여자애가 목소리를 낮추고 툴툴거렸다. “쟤가 걔 맞지? 학기 초에 너 괴롭혔다는 애.” “어, 어,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고. 너랑 알고 지내게 된 다음에 들었지.” 나랑 알고 지내게 된 다음부터라. 알고 지냈다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괜히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아직 얘 이름도 제대로 모르니까. “딱히 처벌 같은 거 받은 것도 아니지? 그렇게 괴롭혀놓고. 집이 협회 높은 사람이랑 이어져있다고 했던가. 아빠가 높은 사람이라 그랬던가?” “맞아. 아마 그럴 거야.” 채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엄마랑도 아는 사이인 것 같더라.” “그럼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요즘 세상에 괜히 그런 거 기록으로 남으면 곤란하잖아? 높은 사람일수록.” “뭐, 협회니까. 굳이 따지자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무원 취급은 아니고, 초인들만 모이는 곳이니까 서로 친목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 채이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어쩌면 자기 엄마와 그런 이야기를 꽤 깊게 나누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채이도 채이 나름대로 날 보호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왜, 내 주변 애들은 하나같이 나를 신경 써주잖아? 결국 내가 똑바로 하지 못하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 아닐까 해서. “……얼른 먹고 나갈까? 기왕 나온 김에 근처 여행도 해볼래? 너희들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좋아하시더라.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했지만.” 여자애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스무디를 빠르게 빨아들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콧잔등을 손으로 꾹 눌렀다. 차가운 걸 갑자기 들이키니까 그렇지. 하지만 여기서 빨리 나가자는 것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라. 저 남자애가 불편하다기보다는, 그 누나라는 사람이 좀. 겉으로 보기에는 딱히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그 표정이 조금 불편하다. 다른 아이들도 여자애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자기 앞에 있는 음료를 빠르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그룹이 단번에 일어나니 아무래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던 건지, 그 남자애랑 누나라는 사람도 우리 쪽을 보았다. 남자애는 슬쩍 시선을 다시 돌려 피했지만, 그 누나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빙긋, 마치 아는 사람과 만났을 때 그러는 것처럼 반갑게 웃어 보이는 것이다. 아는 사람, 일까? 이쪽은 이쪽 여자애와는 다르게 진짜로 몇 마디 대화나 나누어본 게 전부인데. 그렇다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건 조금 그런 것 같아서, 살짝 고개만 숙여 보인 뒤 얼른 친구들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나가는 중에도 뒤쪽에서 시선이 계속 느껴진 건, 기분 탓이겠지? A word from the author (A/N):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최대한 빨리 완성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