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7 제13장. 쟤가 너랑 대화 좀 하고 싶대 (4) 내가 사회생활을 해본바. 회식이 싫은 이유는 직장 상사와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기 때문이지 고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사람이 불편해도 눈앞의 고기는 먹는다. 왜냐하면, 그런 고기도 먹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그러니 남진우도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나와 소이 채이, 그리고 현지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기가 시킨 파스타를 우물우물 열심히 먹었다. 음, 남자답나? 21세기에 그런 것으로 남녀 구분하면 성차별이냐고 극대노할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일단 이런 식의 판단을 하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시 사회생활을 해본바. 남자처럼 입고 머리를 깎아서 진짜 남자처럼 보이는 여성에게 남자 대하듯 대하면 대체로 돌아오는 반응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론 남진우는 애초에 남들 앞에서 대놓고 남자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 그거랑은 또 별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맛있어?” “응!? 읍, 큽!” 내가 한마디 걸었을 뿐인데 남진우는 곧장 사레들렸다. 아니, 이래서야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원작에서야 진짜로 괴롭히긴 했다만, 그 서루아는 남진우와 이렇게 식사 같은 걸 하지는 않았다. 뭔가 괴롭히는 방식이 상당히 일차원적인 알기 쉬운 악역이라 같이 식사하며 꼽주기 같은 소소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 남진우는 가슴을 쿵쿵 두드리다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후우, 겨우 진정했다. “맛있어?” “어, 어, 응.” “좋아하는 거야?” “어, 어, 응.” 어째 출력의 종류가 한 가지밖에 없는 거 같냐. 하긴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긴 했다. 전생의 나는 사람 사귀는 데 상당히 서툴렀다. 직장 상사나 동료가 말을 걸어도 “어, 네.”, “어, 아뇨.” 이런 식의 단답식 대답을 주로 했다. 그것 때문에 나를 그다지 좋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아니, 그럼, 뭐 대체 어쩌라고? 그 이상의 할 말이 없으니까 굳이 길게 대답하지 않는 건데. 그러니까 남진우의 마음을 이해는 할 수 있다. 이해할 수는 있는데……. 뭔가 좀 마음에 안 드네. 뭘까. 조금 고민해 보니 결론이 나왔다. 어쨌거나 나는 남진우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불러온 거다. 비록 바로 옆에 소이와 채이와 현지가 있어서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한다만, 그래도 듣고 싶은 정보가 있단 말이지. 대놓고 물어보지 못하는 시점에서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남진우가 이런 식으로 짧게만 대답하면 내가 판단할 만한 정보가 없다. 다만, 단순히 정보를 주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고. 그보다는…… 역시 만만해서. “……음.” 이번 생의 나도 결국에는 쪼그라든 채 살지 않았던가. 남들이 괴롭혀도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하고. 이유는 다양하다. 그냥 내가 소심한 것도 있고, 혹시라도 우리 가족이나 친구한테 영향이 갈지도 모르고, 내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마녀와의 연관성을 끊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러니까 내게는 세상이 그다지 만만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눈앞에 이렇게 만만한 애가 갑자기 떡하니 나오니. 왠지 서루아가 괴롭힌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렇다고 내가 서루아처럼 되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 “어?” “여기, 묻었는데.” 내가 오른손으로 내 입 주변을 가리키며 말하자, 남진우는 오른손을 들어서 자기 입 오른쪽 주변을 닦았다. 우리 둘이 바라보는 위치가 거울과 같은 위치였으므로, 당연히 묻은 쪽은 그 반대편이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남진우의 얼굴로 손을 뻗자. 쫙쫙. 남진우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채이가 갑자기 휴지를 팍팍 뽑더니 남진우 얼굴에 가져다 댔다. “으뱁.” 그리고 상당히 거칠게 그 얼굴을 벅벅 닦았다. 어, 아니. 그. 물론 평소에도 내 입가에 뭔가 묻으면 소이나 채이가 자주 닦아주긴 하지만. 심지어 소이도 채이도 어째서인지 맨손으로 닦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입으로 빨아먹은 적이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좀. 남의 얼굴에 그러는 건 그렇달까. ……남진우를 걱정하는 건 아니고. 뭔가, 좀 싫다. “……음?” 그러니까…… 나는 소이나 채이가 다른 애 얼굴을 닦아주는 게 싫은 걸까? 아니, 그렇게 행동 하나에 대해 질투하는 것은 아니리라. 남진우가 남자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거의 확신하긴 하지만 완전히 확실한 건 또 아니라서? 아니, 그보다는. 뭐랄까. 혹시라도, 소이와 채이가 나 말고 다른 애랑 더 친해질까봐, 그게 싫다. 왜냐하면 쭉 그렇게 지내왔는걸. 매일 같은 침대에 눕고 자고. 어딜 가도 따라오고, 내가 무서워하면 손을 잡아주고. 그런 애 중 하나라도 빠지는 건 싫으니까. 놀랍도록 음습한 생각을 하는 내게 깜짝 놀라는 사이에, 채이의 손이 내려간다. 그리고 조금 뒤늦게 내 눈치를 살살 보았다. 음, 아니. 잘못이라고 하긴 좀 그런데. 그렇게 얼굴을 붉힐 것까지야. 오히려 생각을 들켰다면 내가 수치심으로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럼, 혼자 지낼 때는 뭐 하면서 지내는데?” 나는 다시 물었다. “어…….” 남진우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원작에서, 남진우가 남는 시간에 뭘 하면서 지내는지 묘사된 바는 없다. 만약 묘사되었다면 내가 보지 않고 대충 넘긴 거고. 난 기억 못 하니까. 하지만 독자들의 합리적인 의심은 있었다. 남진우는 아마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놈일 거라고. 작가가 그런 성향이라 그랬겠지만, 남진우의 대사나 머릿속 독백들은 종종 유명 애니메이션의 패러디였기에.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런 설정이 반영되었다면 이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어, 나는, 그, 여, 영화, 영화 보는데.” “영화? 어떤 영화? 최근엔 뭐 봤는데?” 그냥 최근에 본 영화 제목을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도, 남진우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이 말은 즉, 우리한테 말하기 껄끄러운 ‘영화’를 봤다는 거다. 의심이 한층 짙어진다. 왜, 오타쿠 특징이잖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말했다가는 어떤 시선을 받을지 잘 아니까 숨긴다. 적당히 누구나 좋아할 만한 취미를 대면서 회피하려고. 그리고 그 좋아할 만한 취미는 보통 자기 취미와도 적당히 겹치는 거라서 어느 정도 변명도 가능하다. 정작 그 취미를 정확하게 즐기는 건 또 아니라서, 막상 세세하게 물어보면 도망칠 곳이 없어져 버리긴 하지만. 아마 머릿속으로는 최근에 유행했던 극장 애니메이션 제목을 떠올리고 있을 거다. 여기 있는 애들한테 말해도 다 알고, 싫어하지 않을 법한.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있는 애들한테 좀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싫어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나랑 자주 봤거든. 어차피 들켰으니 그 뒤로는 딱히 숨기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로비에 아슬아슬한 비키니 입은 미소녀를 세워둘 수 있는 게임을 들켰는데 그냥 남들 보는 애니메이션을 못 볼 이유도 없고. 하지만 남진우는 그런 거 모르니까. “어…….” 내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끄는 모습에, 여러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제일 먼저 느끼는 건 그 답답함에 대한 짜증이다.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데 정작 이쪽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느껴지는 답답함. 그리고 만만한 상대를 보는 것에 대한 묘한 만족감. 약간의 공감. “…….” 결국 바로 대답을 듣는 건 포기하고, 나는 그냥 아직 덜 먹은 스테이크에 집중하기나 하기로 했다. 내 시선이 관심 없다는 듯 아래로 내려가자 남진우가 곧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는 게 시야 구석에 보였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 와서 그냥 자유롭게 풀어줄 생각은 없는데. 다시 포크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남진우를 곁눈질로 보며, 나는 생각했다. * “어, 네, 네, 네?” “12만 원입니다.” 남진우의 얼떨떨한 반응에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남진우가 우리 제일 앞에 서서 계산대로 가버리는 바람에 들은 이야기였다. 당연하지만 파스타 하나가 12만 원이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먹은 메뉴를 다 포함해서 그 가격이라는 거지. 아니, 얘는 왜 자기가 제일 앞에 서서 그러는 거지? 설마 우리가 자기한테 밥값을 다 내라고 할까봐? ……아니, 뭐. 학기 첫 주부터 삥뜯기고 있던 걸 생각하면 이것도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긴 하지만. “야.” “히익!?” 남진우 뒤로 다가가서 불렀더니 남진우가 펄쩍 뛰었다. 직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아니, 괴롭히는 거 아닌데요. 우리도 딱히 일진 같은 건 아니고. 물론 나랑 소이랑 채이는 대충 그런 복장을 입긴 했는데, 그래도 현지는 치마를 개조하지는 않았다고. 끝이 살짝 팔랑팔랑하잖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진우의 태도만 보면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너, 돈 많아?” “아, 어? 어?” “돈 많냐고.” “아, 아니…….”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남진우가 고개를 숙인다. 보통 남자애가 이런 표정을 지어 보이면 엄청나게 징그러울 것 같은데, 내가 얘를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객관적으로 그런 인상이 아니라서 그런지. 딱히 거부감은 없다. 카드는 내가 꺼내서 계산했다. 보통 밥 사주면 좋아하기 마련인데. 어째 남진우는 더더욱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날 본다. ……아, 하긴, 회식할 때 내 돈 안 낸다고 고마운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