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1 제22장. 여름이니까! (9) 진우를 돕기 위해서 그쪽으로 얼른 다가가려다가 흠칫 걸음을 멈췄다. 어, 그, 뭐랄까. 지금 우리 수영복 차림이잖아. 물론 수영복 차림인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바다니까. 물론 개중에는 수영복 없이 일상복 차림으로 그냥 물에 들어가 노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역시 수영복 입은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러니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쾌하다고나 할까. 나는 쟤를 싫어하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면적은 속옷이랑 비슷하잖아? 아니, 따지자면 오히려 속옷보다 더 작을 수도 있다. 평소 입는 속옷이라면 당연히 가슴 아래쪽을 거의 다 가려준다. 팬티도 비슷해서, 엉덩이 뒷부분을 거의 온전히 다 가려주는 형태의 속옷을 자주 입었다. 그런데 이 수영복은 아니다. 가슴은 옆과 아래가 조금씩 보이고, 엉덩이를 가리는 삼각형도 면적이 조금 작아서 그 형태를 어느 정도 자랑하듯 보여준다. 애초에 디자인 자체가 몸이 얼마나 예쁜지 보여주려는 듯 생겼으니, 뭐. 그런데 이 모습은 쟤한테 보여주려고 입은 게 아니란 말이지. 내가 남자였던 건 저번 생의 일이긴 하지만, 그 시절의 감성을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다. 나의 몸이나 내 친구들의 몸이라면, 당연히 또래 남자애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할 만한 몸이니까. 심지어 일부 여성도 좋아할 수도 있고. 왜, 성애를 따지는 게 아니라, 예쁜 몸은 남녀 상관 없이 좋아한다고들 하고. 지금 내가 다가가서 저놈 앞에 내 몸을 보여주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겁에 질린 진우의 얼굴을 보고 바로 바뀌었다. “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그러고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내 목소리를 듣고 흠칫 어깨를 떤 그놈이 내 쪽을 보았다. “뭐해?” 신기하게도 말을 더듬지는 않았다. 성질이 머리끝까지 뻗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한테 한 번 진 놈이잖아.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않나? “뭐야, 너희.” “뭐긴, 놀러 온 관광객이지.” 소이가 나서서 말했다. “그리고 지금 막 친구 괴롭히는 녀석을 마주쳤을 뿐이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남의 친구 잡아두고.” “아니, 나는 잡아둔 적.” “그런데 애 표정이 저래?” 진우의 얼굴은 붉다. 창백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의 이런 모습을 다른 아는 사람한테 들킨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고 할지. “오, 뭐야, 다들 와 있었네. 와.” 음. 마지막의 ‘와’는 이쪽으로 오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감탄사였을까? 여자애의 입이 살짝 벌어진 채 고정된 걸 보면 감탄사인 게 분명하다. 그 눈빛이 떨린다. 나와 소이와 채이, 그리고 현지를 번갈아 보고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고. 음, 그, 딱히 뒤떨어지거나 한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충분히 예쁜데? 객관적으로 보면 크다고 할 수도 있는 몸이고, 응. 그래, 큰 게 확실하긴 하다. 그냥 우리 평균보다 조금 작을 뿐인데. “와.” 여자애는 굳이 한 번 더 감탄했다가 얼른 고개를 털어서 생각을 남겨버리고 다시 도끼눈을 한 채 남자애를 보았다. 그리고 진우를 손으로 잡아서 슬쩍 우리 쪽으로 밀었다. 진우는 허둥지둥하다가 또 내 쪽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앗.” 대신 채이가 진우 팔을 잡아서 중심을 잡아주었다. ……채이 동체시력이 이렇게 대단했던가? “그래서, 무슨 일인데?” 소이가 재차 물었다. “지우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지우?” 남자애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 시선이 진우에게 머물렀다가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뭔가 눈이 많이 떨리는데. 자존심 때문인지 어떤 건지, 시선을 우리 얼굴선에서 고정하려고 어마어마하게 애쓰는 게 보이긴 한다. 그렇겠지. 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 꼴 보기도 싫은 애들일 텐데 몸 보고 좋다고 생각하면 바로 놀림감이긴 하지, 응. “얘가 지우야. 내 친척.” 나는 채이 손에 잡혀있던 지우 팔을 잡아다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옆에 단단히 팔짱을 껴 내 옆에 붙였다. “앗.” 진우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얼굴이 더더욱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음. 그렇게 반응하면 좀. 게다가 진우는 마른 주제에 몸은 또 부드럽다. 뭐지? 팔꿈치가 닿은 옆구리라거나, 허벅지라거나. 아까 내 눈앞에 꽉 차게 보였던 하반신은 그저 골격만으로 그런 선을 그렸던 건 아닌 것 같다. “……친척?” “어, 친척. 뭐 때문에 그러는데?” “…….” 이렇게 말해버리니 할 말이 없는 듯 입만 뻐끔뻐끔. 그렇지. 우리는 이미 그렇게 이야기를 마쳐두었다. 누가 의심이라도 하면 애초에 연결조차 하지 못하도록 그냥 진우 이름을 꺼내지도 않기로. 진우와 지우라고 하면 사실 이름이 이미 아주 비슷하긴 하지만, 우리가 우기면 어쩌겠는가? “아니 글쎄, 얘가 얘더러 남자애 아니냐고 묻고 있더라. 참,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어딜 봐도 그냥 귀여운 여자애인데. 그래서 꼬드기려고 말 거나보다 했지.” 누가 봐도 시비 거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걸로 어떻게 꼬드기려고? 하지만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긴 했다. 왜, 열받게 해서 쫓아오게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현실에서 가능할지 어떨지는 몰라도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건 아예 쓰레기 취급을 해줄까 하고 입을 여는데— “무슨 일이니?” 누군가 불쑥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위에 얇은 바람막이를 걸친 여성이었다. 안에는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어,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인데.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여성은 아주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살짝 웃어 보였다. 뭐지? 아는 사람인가? 어디서 마주쳤었지? “어, 누나.” 남자애가 말했다. 아무래도 같이 놀러 온 누나인 듯했다. 그렇다면, 꼬시려고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진짜로 진우라는 걸 알아보고 말을 걸었던 듯. 심장이 쿵쿵 뛴다. 내가 들키는 건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우의 정체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숨기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이제는 내 친구니까. “아, 가족분이세요?” 여자애의 목소리가 바로 공손해졌다. 우리도 자세를 조금 풀어서 조금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짝다리를 짚고 있어서. 정작 내 옆에 붙은 진우는 왠지 떨어지지 않은 채였지만. “네, 그런데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여자가 차분하게 물었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나와 소이, 채이, 현지는 물론이고, 여자애까지. 그리고 금방 말없이 합의했다. 여기서 괜히 더 나갔다가는 이쪽 휴가도 망칠 테니까. “아뇨, 그냥,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요.” “오해요? 오해 맞을까요? 왜냐하면.” “크악!?” 남자애의 누나라는 사람이 빙긋 웃으면서 남자애 귀를 쭉 잡아당겼으니까. 남자애의 목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아프긴 진짜 아픈 모양이다. ……어, 그런데, 얘 능력이 자기 신체 조금 강화하는 거 아니던가. 그런데도 아픈가? 음, 하긴, 나랑 싸울 때도 그렇긴 했어. 내가 팔을 잡아 뽑아버리려고 하니까 기겁했었지. “분명 얘가 이상한 소리나 했으니까 그러고 있는 거겠죠?” “음…….” 여자애가 곤란하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는 사실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일부러 꾸민 표정이라는 거다. “대신 사과할게요. 얘가 아직도 정신을 좀 못 차려서.” 이번에는 시선이 모두 진우에게 향했다. 여전히 내 팔에 나무늘보마냥 꼭 붙어있던 진우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저기, 괜찮아요.” “들었지? 너도 사과해야지.” “아니, 나는.” “어허.” 남자애의 얼굴이 단박에 억울해졌지만, 솔직히 불쌍하지 않다. 그러니까, 진우라는 걸 알아봤을 수는 있지. 그런데 왜 불렀겠는가? 서로 딱히 친하지도 않고 좋은 기억도 없는데. 게다가 그 사건 이후로는 교실에서 서로 모르는 듯 지내기도 했는데 말이다. 분명히 뭔가 꼬투리라도 잡았겠지. “……미, 미안하다.” 결국 남자애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해요.” 그 누나분이 다시 정중하게 사과했다. 역으로 입장이 미묘해진 우리는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대로 있으면 서로 어색할 테니까, 우리는 얼른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여행 즐겁게 보내요.” “앗, 네, 즐거운 휴가 되세요?”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평소에 이런 인사를 해볼 일이 없으니. 여자가 나를 향해서 다시 방긋 웃어주고 몸을 돌렸다. 여전히 남자애는 귀를 잡힌 채였다. 음, 뭐지. 여전히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아. 맞다. 두 사람이 저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지난번에 병원 갈 때 버스에서 본 그 여자. 사실 얼굴이 정확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엄청 비슷하다. 아마 맞지 않을까? 그래서 날 좀 의미심장하게 본 거고. 하긴, 어른들도 휴가 낼 만한 기간이긴 하지. “그런데, 그런데.” 멍하니 뒤를 보는데, 여자애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쪽을 돌아보니 아주 신난 강아지 같은 표정이. “너희끼리만 놀러 온 거야? 어른 없이?” 뭔가 눈을 반짝이는 게, 뭐지. 왜 기대하는 눈빛이지? “부, 부모님이랑…… 그런데 두 분은 따로 계셔.” “그렇구나!” 내 대답에 여자애가 불쑥 외쳤다. “그럼, 우리 같이 놀래? 사실 나는 친척들이랑 왔는데, 으. 알지? 친척 오빠랑 사이 무지 나쁘단 말이야. 그 사람이랑 같은 곳에 있을 바에는 그냥 친구들이랑 있는 게 낫지.” 아.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여름이잖아? 여름이니까! 원래 이런 곳에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최고지!” 그렇게까지 말하면, 아무래도 거절하기 좀 그렇긴 한데. 진우도 구해줬으니, 어쩔 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