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4 제13장. 쟤가 너랑 대화 좀 하고 싶대 (1) 다시 일주일이 흐른다. 그동안 학교는 매우 평온했다. 애초에 평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할까. 오히려 내 전생의 고등학교보다도 더 평온하다고 해야 할까. 전원 기숙사제인 고등학교지 않은가. 학생이 뭔가 대단한 사고를 치고 싶다고 하더라도 주말이 아니면 칠 틈이 없다. 그리고 아직 주말이 한 번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사고를 터뜨릴 시간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할지. 대련 시간이 한 번 더 있기는 했지만 역시 거기서 날 이기거나 한 애는 아직 없다. “아, 됐어, 됐어.” 여러 아이의 순서가 지나고 딱 채이 순서가 되었을 때 유스티나 교관이 손을 휘휘 저었다. “너는 조수잖아. 조수끼리 대련하는 건 좀 그렇지. 본격적으로 대련 시작하면 그때 붙어라.” 아무래도 이번 달은 내내 이런 식으로 보낼 생각인 모양. 나는 조금 안도했다. 다른 아이들과 싸우는 건 괜찮다. 손으로 잡았을 때 아픈 상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전부 견딜만한 통증이었으니까. 하지만 채이가 상대라면…… 나는 손이 잘려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낄 것이다. 그게 진짜로 잘려 나갔을 때의 통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능력이 잘려 나가고, 그 직후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으니 그렇다고 추정할 뿐. 채이는 그때 내 능력을 취소하면서 뭔가를 느꼈던 것 같지만, 상황 자체가 워낙 급박하게 흘러가기도 했고, 능력도 내 능력과 서아린의 능력이 마구 섞여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통증을 느꼈다는 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듯하다. 어쩌면, 오히려 유스티나 교관은 모종의 감각으로 내 능력의 특징을 날카롭게 파악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일부러 채이가 나서려는 걸 막은 거고.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유스티나 교관이 말했다. “다음 순번은…… 백현지.” 유스티나 교관이 말하자 현지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기억하고 있어. 다음 주에는 너부터 시작이니까. 좋아. 수업 시간이…… 5분 정도 남았나? 오늘은 이만하자. 조금 일찍 끝나도 뭐 별로 상관없겠지.” 유스티나 교관의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원래 이 나이대 아이들에게 수업이라는 건 무슨 짓을 해도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서. 그나마 대련은 책상에 달라붙어서 책읽고 필기하는 수업이 아니라 그런지 조금은 인기 있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수업은 수업이니까. 다음 주에는 현지랑 마주하는 걸까. 그 뒤로, 현지와 제대로 대화는 하고 지낸다고 생각한다. 역시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 지나니 역시 괜찮아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거 아닐까. 그래, 현지가 딱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상처를 후벼대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소이가 내 옆에서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내가 괜찮아지니까 소이도 괜찮아졌다. 아마 그럴 거다. 더는 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는 거 아니겠어? 학교 안에서 뭘 하고 논다고 해봐야 대단히 할만한 게 있는 건 아니다. 기껏해야 학생 식당이 아닌 곳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 같은 데 가서 시간을 보내는 정도. 학교 안에 카페가 몇 군데나 있고 잘 꾸며 두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수가 열 개씩 되는 것은 아니다. 몇 번 다니다 보면 갈만한 곳은 다 가볼 수 있고, 곧 금방 지루해진다. 참고로 우리는 저번 주와 이번 주 평일 내내 수업 마치고 학교 안의 모든 가게를 한 번씩 다 가봤으므로, 이제는 어딜 가도 처음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으음, 벚꽃이라도 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소식이 없네.” “그러게. 아직 꽃봉오리도 안 올라왔더라.” 채이가 옆에서 말을 걸고, 소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두 사람이 조금 부산스럽다. 역시 봄이 되니까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런가. 둘 다 벚꽃 피는 시기를 참 좋아해서, 벚꽃이 활짝 피면 나를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가서 사진을 찍곤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중학교 그만두고 나서도, 우리 스마트폰에 남은 사진 속에는 벚꽃을 배경으로 활짝 웃는 우리의 모습이 가득 담겨있었다. “뭐하고 놀래?” 요 며칠 동안 내내 이랬다. 내가 현지와 대화하고 둘이서 들어온 이후로 쭉 이렇게 붙어서는. 혹시 질투라도 하나? “…….” 그리고, 나와 단둘이 대화해서 분위기가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현지도 며칠 동안 쭉 내 눈치를 보았다. 먼저 말을 걸지 않고 조심스럽게 관찰하다가, 내가 웃으면서 말을 걸면 그제야 대꾸한달까. 혹시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지. 하여간에 다들 걱정이 참 많다니까. 음, 뭘 해야 할까. 뭔가 하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시험까지는 한참 남았기 때문이다. 사실 시험 걱정 하기에는 너무 학기 초이기도 하고. 이제야 입학한 지 막 2주 차 되는 시기니까. 기왕이면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다. 인기인이 되고 싶다는 내 생각은 여전했다. 대련 수업이 진행되고, 내게 뭔가 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애 중에는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애도 있지만, 동시에 나를 조금 인정하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는 애도 있으니까. 어쩌면 조금만 더 지나면 친구가 더 생기지 않을까? 현지랑 친구가 되었으니, 분명 가능할 거다. 그러니까 뭔가 해야 했다. 괜히 아무것도 안 하고 기숙사에 멍하니 앉아있으면 뭔가 자꾸 생각이 나니까. 잡생각은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정신건강에. “……아.” 머릿속이 그 ‘멍하니 생각하는 단계’에 자꾸 들어가려고 해서 얼른 시선을 돌리다가, 저 끄트머리에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 남진우를 발견했다. 여전히 경계하는 마음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다. 여자였다고 하더라도 하렘을 만들던 녀석이긴 하니까. 혹시라도 나도 그 하렘의 영역에 들어가 버리는 건 아닌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원작과는 좀 다르잖아? 사실 이때쯤 되면 이미 남진우 근처에 다른 여자애가 꼬여 있었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전혀 없이 혼자다. “…….” 그래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이 세상에서 원작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는가. 딱 나 한 명뿐이다.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고, 아이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러니까 만약 뭔가 바뀌었다면 나 때문에 바뀐 것이기도 하고. 도현 아저씨가 살아남은 건 좋은 일이다. 소이가 아버지를 잃을 일이 없었던 거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소이의 성격은 음습하게 남을 괴롭히는 성격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밝은 성격을 그대로 지니게 되었고, 채이도 의존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음. 오히려 나를 잘 휘두른달까, 아무튼 그때보다는 좀 나은 성격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현지는. 아버지가— 아니아니. 그래. 아니지. 남진우 생각을 하는 중이었지, 응. 남진우는, 혼자가 되었다. 그야 처음에는 조금 괴롭힘 당하긴 했어도, 결국에는 이겨내고 강인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이었는데. 저렇게 바뀔 이유가 나 밖에 없다면, 내가 본의 아니게 남진우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린 건 아닌가 해서. “……말 걸고 싶어?” “흐헷.” 갑자기 소곤거리는 소리에 목을 움츠렸다. 소이가 내 귀에 입을 바싹대고 소곤거린 탓이다. 귀가 엄청나게 간지러웠다. 정작 팔은 붙들려서 긁지도 못했지만. “아, 아니, 나는. 흐헤.” “그럼,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소이가 또 내 귀에 짓궂게 속삭였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듯. 얘는 또 뭐에 그렇게 심통 난 거지? 내가 다른 애랑 친구가 되는 것도 다 질투하는 걸까? 성격이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건 아닌가 보다. 원작보다 질투심이 어마어마한 걸 보면. 뭐, 덕분에 원작보다는 정조 관념이 제대로 박힌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원작에서는 남주인공과 이어질 만한 상황에서도 다른 남자애들이랑 자꾸 붙어있는 게— “흡.” 나는 얼른 생각을 돌렸다. 그렇다. 이제 와서 원작 생각을 하면 뭐 하겠어? 내가 알던 거랑 너무 달라서 엉망진창인데. 당장 남진우만 해도 그렇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심지어 그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쟤의 성별에 대한 내 판단은 여자 쪽으로 70퍼센트 이상 기울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알아내는 게 좋지 않을까? 원작에서 의도적으로 피한 건지 남진우의 룸메이트나 그런 애들에 대한 묘사는 없었으니까. 남진우 주변에 맴도는 남자애들이 많으면 하렘물에 남자 조연이 너무 많아지니 그냥 적당히 생략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 나왔던 드리프트 논란이나, 그런 걸 생각하면. 좋아. “……응.” “그렇지? 역시 아무래도 남자애한테 말을 거는 건, 어라?” 내 대답을 예상하였던 건지 웃으면서 말하던 소이가 딱 굳었다. “말, 걸고 싶어.” “어어? 어라라?” 소이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흐, 흐응~”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고 나서야 소이는 조금 여유로운 듯 웃으면서 그 특유의 콧소리를 냈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흐으응~ 그러니까 루아가, 흐응.” 여유로운 것 치고는 너무 콧소리를 섞어서 오히려 여유가 없어 보이는데. 혹시 싶어서 옆을 돌아보니까 채이가 눈을 부릅뜨고 날 보고 있었다. 아니, 얘는 왜 그래? “말 걸고 싶어?”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게 현지가 물었다. “어? 야, 잠깐!”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현지가 저벅저벅 걸어서 남진우에게 다가갔다. “히익!?” 어깨를 구부정하게 한 채 얼른 체육관을 나가려던 남진우가 현지한테 어깨를 잡혀 비명을 질렀다. “쟤가 너랑 대화 좀 하고 싶다는데.” 현지가 엄지를 세워 척, 자기 뒤쪽 좀 멀리 떨어져 서있는 날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현지야? 그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좀. ……남진우도 새하얗게 질렸잖아. A word from the author (A/N):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 분량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대신 다음주에는 두 화 분량을 올리는 날을 6회로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