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 제22장. 여름이니까! (8)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놀기는 잘 놀았다. 현지도 내가 얼굴로 가슴을 한 번 때려준 뒤론 아이들 사이에 섞여 들긴 했고. 어째서인지 소이와 채이가 합심해서 공격하는 바람에 물에 쫄딱 젖은 현지가 분노해서 두 사람을 향해 아주 차갑게 식은 바닷물을 뿌려버리는 일도 있었고, 어느새 현지 편에 붙은 진우가 소이와 채이에게 물을 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우가 오늘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은 현지가 갑자기 소이와 채이 쪽에 붙어버리는 일도 있긴 했지만. 뭐, 여름이니까. 바다니까. 원래 물장구치면서 놀다 보면 자기도 누구 편인지 모르게 되는 법이라. 오전 내내 한바탕 물장구친 아이들은 어딘가 후련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후우.” 물에서 노는 건 체력을 어마어마하게 소모한다. 아무리 골든 리트리버마냥 에너지 넘치는 10대 소녀들이라도 오전 내내 바다에서 놀았다면 한참 쉬어야 하는 법이고. 파라솔 아래 깔아둔 돗자리 위에 앉아 잠깐 숨을 골랐다. 점심 먹을 시간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오전에 너무 격하게 놀아버렸던지라 지금 바로 속에 뭐가 들어가면 탈 날 것 같기도 해서. “나, 나.” 그러던 와중에 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바로 앞쪽에 앉아있던 진우였기에 하필이면 내 눈앞에 진우의, 그, 뭐냐, 뒷모습? 하반신의 뒷모습? 아무튼 보통 웬만해서는 시야 가득히 넣을 일 없는 통통한 부분이 한가득 들어와 버렸다. 진우는 의외로 하반신이 상당히 발달했다. 그렇다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발달한 하체는 아니다. 근육이 많다기보다는, 살집이 있는데, 그렇다고 딱히 뚱뚱하다고 할 수는 없고, 진짜 순수하게 골반뼈가 넓다고 해야 할지. 몸이 전반적으로 말라서 허리가 더 들어가 보여 그런 것도 있고. ……정작 나는 가슴을 만져보고 알긴 했지만, 왜 이런 뒷모습을 보고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 못 챈 건지 모르겠네. 다행히 진우는 나의 그런 생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서 우리 쪽을 보았다. “다, 다녀올게.” “어? 어디를?” “어, 그.” 진우는 잠깐 우물우물하다가. “화장실…….” 하고 자신 없게 말하는 것이다. 그 태도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니, 가고 싶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 하긴, 얘는 또 여자 화장실 가는 게 어색할 수도 있겠다 싶고. ……물론, 그렇다고 진우가 남자 화장실에 간다는 건 아니다. 남장여자이긴 해도, 자기가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 또 아니라. 그렇다면 평소에는 어찌하는가. 일단 참는다. 참다가, 기숙사 화장실에 간다. 점심시간에 다녀올 수 있으니까. 평소에는 음료 같은 거 거의 마시지 않고. 그나마 카페 같은 곳에서는 가긴 가는데, 그것도 보통은 남녀 공용 화장실이라서 눈치 안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 여자 화장실 가는 데 있어서 큰 문제가 있는 애는 아니지만. “같이 가줄까?” 내가 장난스럽게 물어보자, 진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고개를 파닥파닥 젓는 게 좀 재미있었다. 얼른 몸을 돌려서 화장실을 향하는 진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루아는 진우한테 말할 때만 자연스럽네.” “흐, 흐헷?” 갑작스러운 말에 흠칫 놀랐다. 소이였다. “진우랑 말할 때만 말도 안 더듬고, 막 자연스럽잖아.” 소이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말했다. “어, 어라.” 그런가? 확실히 그렇긴 하다. 솔직히 자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야, 진우는 만만하니까. 분명 진우는 강하다. 그 힘을 잘 쓰지 않고, 또 평소에 쓸 일도 없을 뿐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나중에 그 힘으로 악당들과 맞서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음. 그런 힘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라고 할지. 예를 들어서, 물론 내가 그럴 일은 없다고 하지만, 내 주변 애들한테 확 달려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소이와 채이는 왠지 장난하듯 받아줄 것 같고, 현지는 정색할 것 같다. 진우는, 뭐랄까. 육식동물한테 잡아먹히는 초식동물마냥 꺄앙 하면서 깔릴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 어, 음.” 잠깐 생각을 고르다가, “시, 싫어?” 하고 물었다. “아니, 뭐, 싫다는 건 아닌데, 그냥.” 소이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채이가 쓰게 웃고, 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서운한 건 아니고.” 서운해 보이는데.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이건 따지자면 내 잘못이니까.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내온 소이인데, 그런 소이한테는 자꾸 말을 더듬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내가 소이 앞에서 말을 더듬는 건 그냥 버릇 같은 거다. 소이가 불편하고 그래서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따지자면, 진우를 그냥 만만하게 보는 거에 가깝기도 하고. 그렇다고 진우가 싫거나 그런 건 또 아니긴 하지만. “그, 그래도, 소이도 소중한 친구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말하고 나니까 얼굴이 확 익어버린다. 왜, 친구끼리도 이런 말은 안 하지 않는가. 사실 잘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 진짜 친구라고 할만한 애들은 여기 있는 애들이 전부라서. 일단 전생에는 친구끼리 이런 말 절대 안 하긴 했지, 응. “…….” 정작 소이의 얼굴도 빨갛게 익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루아야, 나는, 나는!?” “채이도 당연히. 소중한 친구야.” 그러자 채이의 얼굴도 익는다. 대답을 조른 것 치고는 너무나 확실한 반응이었다. 현지와 눈을 마주쳤다. 현지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친구이긴 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은 걸까? 솔직히 나도 같은 말을 또 하기에는 용기가 조금 모자라서, 현지에게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음. 시간이 꽤 지났는데 진우가 오지 않는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지 이미 다 정해두었고, 점심 먹고 나서 먹을 빙수까지 다 정해두었는데. 진우가 떠난 지 20여 분. 화장실에 사람이 많은 걸 수도 있긴 했다. 특히 여자들은 소변만 보더라도 남자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도 하니, 충분히 걸릴 수 있는 시간이긴 하지만. 일단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대답이 없다. “찾으러 가야 하나?” “찾으러 갔는데 엇갈리면?” “그럼 전화로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 그리고 엇갈릴 일도 없는 곳 아냐? 화장실은 근처에 한 곳뿐인데.” 넓은 해변이니 당연히 화장실도 여럿이긴 하지만, 우리 쪽에서 가까운 곳은 한 곳뿐이다. 굳이 다른 곳으로 가면 가는 와중에 오히려 더 급해질 수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차피 사람 많은 건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 “다 같이 찾으러 가볼까? 괜히 한두 명만 남아서 기다리기도 좀 그렇고.” 현지가 뭔가 말하려다가 소이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기가 기다린다고 하려다가 다문 것 같은데. 그래, 어차피 다 같이 놀러 온 거, 다 같이 다니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 그리고, 소이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딱히 엇갈릴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진우를 만났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싫다잖아?” 그리고 그런 진우 옆에서, 어떤 여자애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어라.” 소이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애는 우리도 아는 애였다. ‘아는 애’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그 애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다. 학기 중순에 만나서, 결국 타이밍을 재지 못해서 한 학기 끝날 때까지 이름을 알지 못했던 여자애가. 수영복 차림으로,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어깨를 딱 벌리고 서서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애한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 기이하게도, 그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애도 내가 아는 애였다. 이쪽도 이름을 모르긴 하는데, 본의 아니게 모른 건 아니고. 딱히 알고 싶지 않달까. 학기 첫날에 괜히 현지 들먹이면서 나한테 시비 걸었던 그놈이라.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이와 채이의 눈에선 이미 불꽃이 튀고 있었다. 현지는 한숨을 푹 쉬면서 얼굴을 쓸어내렸고. 그리고 화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우리끼리 재미있게 노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게 아닌가. 아니, 저 여자애야 껴도 상관은 없긴 한데. 그래서 화나서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아니, 그러니까 같이 놀자던 게 아니라니까?” 남자애가 항변하듯이 말했다. “그냥 아는 얼굴인 것 같아서 말 걸었던 것뿐이라고!” 엄청나게 답답하고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 걸음을 멈췄다. 그, 뭐냐. 이거 좀 위험한가? “아니, 그러니까 그게 꼬시는 거 아니야!?” 그리고 여자애는 엄청나게 당당하다는 듯 어깨를 쭉 펴고 외쳤다. “얘는 지우라고! 진우가 아니라!” “어, 저, 저, 그.” 참고로 진우는 어깨까지 붉게 익어서는 뭐라고 말도 잘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는 채였다. 나는 소이와 채이를 돌아보았다. 분기탱천해서 나아간 것 치고는, 좀 볼품없는 반응이긴 했지만. 그런데 어째. 솔직히 좀 쫄리는걸. 괜히 말실수라도 하면 끝장 아냐, 이거? A word from the author (A/N):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